첫 출근 날, 생산보고서 업무에 배치했다. 직원이 있는데 곧 출산 예정이라 업무 인수인계하고 통역 필요할 때 부르기로

 

했다. 아침에 조금 바쁘고 그 이후로는 여유로운 자리였다.

 

 

점심시간에 밥 먹으러 식당 가려는데 나한테 오면서 작은 종이를 가져오길래 뭔가 싶어서 보니 외출증이었다.

 

퇴근 시간 전에 공장 밖으로 나가려면 경비에게 서명이 있는 외출증을 반드시 줘야 했는데 공장 직원들이 거의 여자이고

 

애 있는 엄마가 많아서 혹시나 아프면 봐줘야 했기에 이야기하면 서명해주곤 했다. 업무 때문에 외출해야 할 때도

 

마찬가지였다. 가끔씩 점심 먹고 남는 시간에 후식 먹으러 사무실 직원들이랑 카페 갈 때가 있는데 이 때는 나랑 같이

 

나가면서 내가 경비들한테 말했고 이 경우를 제외하고는 사무실 직원, 현장 관리자들은 항상 내 서명을 받았다.

 

현장 일반 직원들은 수가 너무 많아 관리자들한테 위임했었다. 직원들이 외출증 들고 오면 웬만하면 이야기 대충 듣고

 

서명했는데 첫날부터 외출증 가지고 오길래 물어봤다.

 

나 : 외출? 집에 뭔 일 있어?

 

여자 : 집에 가서 점심 먹고 오려고요.

 

나: 우리 점심 제공되는데?

 

여자 : 너무 맛없어서 못 먹겠어요.

 

당황했고 이게 뭔 일인가 싶었다가 제정신으로 돌아왔다. 맛없긴 했는데 발령 왔을 때부터 똑같이 먹고 있었고 다른

 

직원들도 별 말없이 먹고 있었다. 이 여자가 베트남 사람 맞나 싶었다.

 

나 : 맛없는 건 사실인데... 그러면 아무 말없이 먹고 있는 사람들은 뭐야?

 

여자 : 도저히 내 입맛에 안 맞아서 먹기 힘들어요.

 

나 : 한국 사람인 나도 똑같이 먹고 있는데 입맛으로 따지면 내가 더 안 맞잖아?

 

여자 :...

 

나 : 오늘은 첫날이니 서명해주는데 다음부터는 안 해준다.

 

이후로 밥 때문에 외출증 내미는 일은 없었다.

 

 

월병 관련한 일도 있었다. 추석 때 여러 업체에서 월병이 선물로 왔었다. 혼자 다 못 먹으니 책상 옆에 쌓아뒀다가

 

점심 먹고 사무실 직원들이랑 나눠 먹었다. 다른 사람들 다 먹고 있는데 안 먹고 있길래

 

나 : 왜 안 먹어? 배불러서?

 

여자 : (갑자기 한국말로) 배부른 거 아니에요.

 

나 : (한국말) 월병 안 좋아하나 보네?

 

여자 : 이거 다 공장에서 만든 거라 몸에 안 좋은 거예요. 먹지 마세요.

 

뭔가 이상하다 싶었는데 일단 업무적으로 문제가 없었으니 가만히 놔뒀다. 사적으로 만나면 착하고 자상한 면이 있어서

 

좋았는데 회사에서는 기믹이 있었던 게 아닌가 싶었다.

 

 

베트남어를 모를 때 채용한 거였으면 개인비서(?)로 쓰면서 통역하고 잡다한 일 관리하게끔 했을 건데 이미 베트남어로

 

모든 업무처리를 할 때라 별 필요가 없었다. 시험 삼아 어느 정도까지 통역 가능할까 싶어서 현장에 데리고 간 적이

 

있었다. 기계 고장 났다길래 통역시켜봤는데 예상했던 대로 제대로 된 통역이 안 됐었다. 차라리 영어 잘하는 직원

 

불러서 영어로 통역하는 게 일처리가 빨랐다. 사장이 의도한 대로 현장관리자들이랑 이야기해봐도 매번 베트남어로

 

대화하는 내용이 전부였다. 이제 와서 퇴사시킬 수 없으니 그냥 보고서 업무나 계속 맡겼다. 통역시킬 일이 없었다.

 

얼마 동안 지켜봤는데 나름 업무에 잘 적응하고 있는 듯 보였다. 하루는 퇴근시간에 따로 불렀다.

 

나 : 일은 할 만해?

 

여자 : 할 만해요. 괜찮은 거 같아요.

 

나 : 다행이네. 그리고 서로 언어 배우면 좋으니까 시간 되면 카페에서 차 마시면서 대화할까?

 

여자 : 좋아요.

 

거절하면 어떡하나 싶었다가 의외로 쉽게 승낙을 받았는데 알고 보니 언니 따라 이 동네 온 거라 얘도 아는 사람이 없어

 

심심하던 찰나였다. 어디 사냐고 물어보니 집에서 오토바이로 5분도 안 걸리는 곳에 살고 있었다.

 

 

주중에는 시간 될 때 가끔 보고 주말에는 호치민 안 갈 때 매번 봤다. 주로 카페에 가거나 공원에서 산책하면서 대화를

 

했는데 베트남어 한국어 8:2 비율로 사용했다. 성격도 괜찮아 보였고 배려심도 있어 보였다. 무엇보다 퇴근하고

 

넓은 집에서 묵언 수행하는 스님처럼 아무 말 안 하고 있는 공허한 생활에서 누군가와 만나고 대화를 할 수 있다는 게

 

기뻤다.

 

 

어느 일요일, 같이 마트 갔다가 집으로 걸어오는 길에 사귀자고 했다. 대답을 듣기까지의 1초가 1시간 같았고

 

조마조마했다. 영겁 같은 시간이 지났고 원하던 대답을 들을 수 있었다. 당분간은 회사 사람들한테 비밀로 하기로 했다.

 

 

월요일 아침, 평소 같았으면 월요병을 앓았을 건데 그런 거 없었다. 회사에서는 절대 내색 안 하고 그냥 눈치껏 보기만

 

했다. 신분상승(?)으로 특혜시비가 일어날 수 있기에 그런 점에서는 굉장히 조심했다. 공과 사는 확실히 구분했었다.

 

둘 다 딱히 할 게 없으니 거의 매일 퇴근 후에 만났다. 저녁도 한 번씩 같이 먹었고 나름 이 동네 맛집은 웬만하면

 

다 안다고 생각했는데 몇몇 군데를 추가로 알게 됐다. 우물 안 개구리였다. 여친과 여친 언니 둘만 같이 살고 있어서

 

혹시나 언니가 외로울까 봐 자주 먹진 않았다. 데이트할 때는 아는 사람한테 걸려 소문날까 봐 조명이 어둡거나

 

구석진 곳을 찾아서 갔다. 소문이 있는 사실로만 퍼지면 신경 안 써도 되는데 한 다리 건널 때마다 와전이 됐었다.

 

사실 : 손 잡고 데이트

 

와전 : 포옹하는 거 봤다 뽀뽀도 했다는데? 뽀뽀 아니고 키스였다 조금 있으면 결혼한단다

 

직원들 말로는 젊은 한국인이 나라는 걸 웬만한 동네 사람들이 다 알고 있다고 했기에 걸릴까 봐 조마조마했었다.

 

 

연애 초반엔 한국어도 섞어 쓰다가 나중에는 베트남어만 쓰게 됐다. 여친 입장에서는 베트남어가 편하고 내 입장에서는

 

거의 영어나 베트남어만 쓰다 보니 한국어에 대한 어색함을 느낄 때라 굳이 한국어 쓰지 않았다. 단어 잘 못 쓴다고

 

여친한테 혼나기도 많이 혼났다.

 

 

여친 언니가 저녁 식사 초대를 한 적이 있었는데 거절할 이유가 딱히 없어서 응했고 집으로 찾아갔다. 도착하니 여친만

 

있었는데 밥은 다른 곳에서 먹는다며 10분쯤 오토바이 타고 따라가니 어느 집에 도착했다. 여친언니와 웬 남자가

 

거실 바닥에 음식을 차리고 있었는데 누군지 물어보니 여친언니 남편 될 사람이었다. 지난번 직원 장인어른 될

 

사람 자리도 그렇고 이번에도 뭔가 어색한 자리에 나를 초대했는데 역시나 그냥 돌아갈 수는 없어서 그냥 앉아서 먹기로

 

했다. 다음부터는 누군가에게 초대받으면 누가 참석하는지 꼭 물어보기로 다짐했다. 여느 베트남 가정식과 다를 바

 

없었고 매일 먹고 있는 게 베트남 음식인지라 입맛에 안 맞는 건 없었다. 김치가 있길래 '너희도 김치 먹어?' 라고 물으니

 

한국인 '나'를 위해 일부러 사 왔다고 했다. 정말 맛없는 김치여서 한 조각 먹고 안 먹었는데 김치 안 먹냐고 물어보길래

 

차마 맛없다고는 말 못 하고 '김치 싫어한다.' 고 대답해줬다. 식사 끝나고 차 마실 때까지 대화하다가 시간이 늦어

 

집으로 가기 위해 대문을 벗어나는 순간부터 어색함을 떨쳐낼 수 있었다.

 

 

직원들한테 들킬 거 같기도 했고 밖에서 하는 게 늘 똑같은 거라 집에서 데이트하기도 했다. 넓은 집에 혼자보다

 

둘이 있으니 그나마 덜 적막했다. 저녁식사나 음료수 같은 걸 포장해서 1층 부엌에서 먹고 2층 방에서 이야기하거나

 

노트북으로 영화를 보기도 했다. 여친이 우리 집에 오토바이를 타고 왔는데 타는 모습을 보니 베트남인 치고는

 

상당히 못 타는 편이었다. 내가 처음으로 오토바이 타고 1주일 정도까지의 모습을 보는 거 같았다. 출근하면서

 

사고 안 내고 다니는 게 신기할 정도였다. 한 번은 우리 집 입구에서 실수를 해서 옆집 대문을 박은 적이 있었는데

 

다행히 다친 사람 없고 물피도 오토바이 조금 긁힌 거 말곤 없어 옆집 주인이 그냥 웃으면서 넘어갔는데

 

 

 

 

 

 

 

 

 

 

 

 

 

안 되겠다 싶어서 우리 집 올 때 걸어서 오고 갈 때는 내가 오토바이로 데려다 주기로 했다. 자동차를 잘 타는 것도

 

아니었는데 멀미가 심한 편이었다. 여행 간답시고 버스를 탄 적이 있었는데 멀미 때문에 힘들어하는 걸 볼 수 있었다.

 

동기들한테 소개 겸 데이트하러 호치민에 가자고 했는데 못 가겠다고 했다. 버스 안 타고 렌터카 타고 간다고 했는데도

 

거절했었는데 최종적으로 여친과 호치민 가본 적이 없게 됐다.

 

 

여친과 만나면서 처음으로 우비를 사용했다. 그 전에는 비가 올 거 같으면 무조건 택시타서 경비처리 했는데 여친 집이

 

멀지 않고 택시 기다리는 것도 지루해서 여느 베트남인들과 마찬가지로 우비 쓰고 오토바이 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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