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억팔이] 베트남 주재원 (동네)
같이 있던 선배가 퇴사한 이후로 본격적으로 내 스타일대로 생활이나 업무를 이끌어갔다. 더 이상 눈치 볼 필요 없이
마음대로 다닐 수 있으니 이때부터 내가 살고 있는 동네에 대해 자세히 알 수 있었다.
전체적으로 조용하고 한적한 곳이었는데 북적거리는 걸 싫어하는 성격과 부합되는 곳이었고 어디 구석에 박혀있는
회사의 다른 공장과는 달리 그나마 번화가가 인근에 있어 가고 싶은 곳, 먹고 싶은 것 맘대로 할 수 있었다. 하지만 다른
공장에 비해서 일뿐 동네 자체가 도시처럼 개발되어 있진 않았다.
집 입구에서 왼쪽으로 10 발자국 또는 오른쪽으로 25 발자국 가면 쌀국수 가게가 있었는데 파는 메뉴가 각각 달라
선배와 있을 땐 격일로 아침 먹으러 갔었다. 오토바이 타고 멀리 나가면 좀 더 고급지고 맛있는 쌀국수 가게들이
있었는데 가격이 동네 평균 시세보다 2배 정도 비쌌음에도 불구하고 항상 사람이 많아서 기다렸다가 먹어야 했다.
먹다가 출근시간이 늦어질 수 있어 출장자가 왔을 때만 가곤 했다. 집 맞은편에는 미용실에 연달아 3곳이 있었다.
크진 않고 의자 2개 정도 들어갈 정도의 수준이었다. 첫 번째 미용실 주인이 상당히 예뻤는데 피부가 하얬고 (일반적인
베트남 사람 대비가 아니라 한국 사람 대비) 20대 중반 정도로 보였다. 가라오케 여자들이 20대에 바짝 벌고 고향 와서
미용실 차린다는 얘기를 많이 들었고 실제로 가라오케에서도 그런 계획을 가지고 있는 여자들을 많이 봐서 가라오케
출신이 아닐까 하는 추측을 했었다. 선배가 두피 마사지받으러 가면서 대화해보라고 했는데 숫기가 없어서 그러진
못 했다. 유부녀인 거 같았는데 오랜 시간 지나지 않아 만삭의 배를 가지게 된 것을 봤기 때문이다. 혹시나 건드렸으면
가족들한테 두들겨 맞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왼쪽 쌀국수집 바로 옆에 5층 건물이 있었는데 2층에 나이트클럽이 있었다. '한 번 가볼까' 하는 호기심도 없었던
곳이었는데 동기가 동네에 놀러 와서 토요일 밤에 가본 적이 있었다. 여자들은 서빙하는 여자들 빼곤 아무도 없었고
나이 많은 아저씨들만 몇몇 있었다. 음악소리가 너무 시끄러웠는데 바로 옆사람이랑 대화를 전혀 할 수 없어서 맥주
1캔씩만 마시고 나왔다. 내 방 테라스에서도 이 건물이 보였는데 술 먹고 밤늦게 도로 한가운데서 몇 명씩 싸우다가
공안이 와서 말리는 모습을 종종 볼 수 있었다.
전력 공급이 불안정했는데 한 달에 무조건 2번 이상은 정전이 됐었다. 나야 노트북 쓰니까 별 다른 피해는 없었는데
정전되는 순간, 사무실 직원들이랑 현장 직원들이 동시에 '아~' 그러면서 탄식을 내뱉었다. 유지/보수 직원들은 정전되는
순간 달려가서 비상발전기 켜고 기름값 결제 올라오면 나는 사인하고, 매번 이런 식이었다.
정전 때문에 재밌는 경험을 한 적이 있었다. 1월 1일에 집에서 쉬고 있었는데 점심 먹고 얼마 지나지 않아 정전이 됐다.
우리 집만 됐나 싶어서 밖을 봤는데 동네 사람들이 다들 어리둥절하는 걸 보니 동네 전체가 정전이었다. 보통 몇 시간
뒤면 복구되기 때문에 영화나 한 편 보고 낮잠을 잤다. 자고 일어나니 6시 좀 넘었고 아직도 집에 전기가 안 들어왔었다.
뭔가 이상하다 싶어서 밖을 보니 우리 집 빼고 전부다 전기가 들어오고 있었다. 직원한테 전화하니 우리 집에 와서
이것저것 점검하는데 아무 이상이 없으니 어디론가 전화를 했다. 전화 끊고 나한테 하는 말이 회계직원이 깜빡하고
전기세 안 내서 전기가 안 들어온다는 거였다. 어떡할까 고민하다가 동네 호텔 수준이 어느 정도인지 알고 싶은 마음이
평소에 있어 이것저것 챙겨서 호텔로 갔다. 나쁘지도 않고 좋지도 않은 그저 그런 수준이었다. 다음 날 호텔에서
바로 공장으로 출근했는데 회계직원한테 아무 말 안 했다. 회계직원 대신에 인사부장이 와서 미안하다 그러길래
그냥 그러려니 했다. 이런 식으로 호텔 구경했으니 딱히 기분 나쁘진 않았다.
식당이 큰 곳 3군데 있었는데 각각 주로 먹는 메뉴가 달랐다. 첫 번째 식당은 베트남+서양 퓨전음식을 주로 팔았는데
그중에서 큐브 모양 소고기와 감자튀김이 같이 나오는 메뉴를 제일 좋아했다. 맛있어서 무조건 2 접시 이상 먹었다.
2층에는 넓은 홀이 있었고 주말마다 결혼식이 열렸는데 집에 돈 좀 있다 싶은 사람들이 이용했었다.
두 번째 식당은 오리지널 베트남식을 팔았다. 4층 건물인데 전층을 식당으로 쓰고 있었다. 가끔씩 찾아가면 4층까지
손님이 있어 기다렸다가 먹어야 하는 경우도 있었다. 좋아하는 메뉴가 삼겹살이었고 비계 부분은 튀긴 것처럼 바삭하고
살은 부드러웠는데 고추 빻아 넣은 간장에 찍어 먹으면 아주 맛있었다. 특히 버스 타고 동네를 지나가는 관광객들이
많이 왔는데 당일에 팔 재료가 떨어져 가게 문을 일찍 닫는 것을 심심치 않게 볼 수 있었다.
마지막 식당은 가로등 없는 길을 따라 들어갈 수 있는 외진 곳에 있었고 베트남+동양 퓨전음식을 팔았다. 약 100여 개의
메뉴가 있었는데 늘 먹던 것만 먹어서 다 먹진 못했다. 가장 비싼 식당이었는데 먹다 보면 한국에서 먹는 것보다
가격이 더 나왔었다. 일부러 외진 곳까지 가기도 그렇고 가격대가 어느 정도 있어서 출장자가 오거나 사무실 직원
회식 때 회사 경비로 처리했었다. 특이하게도 다른 식당에서 찾아볼 수 없었던 중국인들이 많이 있었다.
새끼 돼지 삼겹살 부위와 김치가 같이 나오는 메뉴를 가장 좋아했는데 삼겹살은 둘째치고 김치가 정말 맛있었다.
먹다 보면 김치가 먼저 없어져 김치만 따로 추가로 주문하곤 했었다. 다른 두 식당과는 달리 방이 따로 있었다.
동네 중앙에는 시장이 있었다. 집 근처에도 과일 파는 곳이 있었는데 사람 구경하고 바람도 쐴 겸 과일을 자주 사러
갔었다. 빵집도 자주 갔는데 저렴한 가격에 맞는 품질이었다. 주인아저씨가 숫자에 약한지 한 번도 거스름돈을
맞게 준 적이 없었는데 많이 줄 때도 있고 적게 줄 때도 있었다. 1~200원 차이라 그냥 그러려니 했다.